(중국 충칭=신화통신) "지난 1992년 중?한 수교 이전에도 중국 충칭(重慶) 대한민국 임시정부 유적지를 찾는 한국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있었습니다." 샤쉐(夏雪) 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 유적지 진열관 부관장은 신화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이같이 말했다.
충칭시 위중(?中)구의 고층 빌딩 숲 사이로 난 골목길을 지나자 새롭게 단장한 회색 건축물이 눈에 확 들어왔다. 청색 기와와 회색 벽돌, U자형 계단식 합원(合院)인 이곳은 오랜 세월 속에서도 장엄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대문 상단에는 세 줄에 걸쳐 중국어·한글·영어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라고 쓰여 있었다.
샤 부관장은 중?한 수교 이후 한국 측이 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 유적지를 복원하길 희망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당시 유적지의 소재지는 이미 주거지역이 된 지 오래였고 게다가 한 기업이 이미 부동산 개발을 계획하고 있었다.
샤 부관장은 "당시 충칭시 정부가 경제적 손실을 감수하고 소유 기업에 보상을 해줘 이곳을 지켜냈다"고 말했다. 이어 복원을 통해 당시 한국 임시정부 청사 유적지의 본래 모습을 최대한 살려냈으며 기념관을 건설해 지난 1995년 8월 정식 개관했다고 덧붙였다.
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 유적지는 험난한 세월 동안 지켜온 중국과 한국의 우정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으며 애국지사들이 나라의 광복을 위해 충칭에서 걸어온 옛 발자취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지난 1919년 상하이에서 설립됐다. 1940년 1월 충칭시 도심지역으로 이전하면서 그간 지하에서 활동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이끌어온 반일 독립운동도 공개로 전환됐고 충칭도 이 독립운동의 정치적 중심지로 떠올랐다.
"당시 중국의 항일 전쟁은 가장 치열하고 어려운 단계에 진입했는데 이렇게 고달픈 시기에도 중국인들은 자신의 이웃을 잊지 않고 최선을 다해 도움을 줬습니다."
샤 부관장은 '신화일보'가 한민족 반일 독립운동과 한국광복군의 행보에 대해 많은 보도와 홍보를 했다고 소개했다. 평범한 중국인들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성원들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도와줬다고 덧붙였다.
1940년 9월 17일 한국광복군은 충칭 자링(嘉陵)호텔에서 총사령부 창립식을 열었다. 해당 사실은 서울 용산구 효창동에 위치한 백범김구기념관에도 기록돼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유적지 진열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창립식 방문객' 명단에는 저우언라이(周恩來)?둥비우(董必武)의 서명이 남겨져 있다.
한국 백범김구기념관 1층에서 2층으로 연결되는 통로 벽에는 상하이?항저우(杭州)?자싱(嘉興)?전장(?江) 등 지역이 새겨진 부조가 걸려 있다. 이 부조들은 김구 선생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중국 본토에서 20여 년간 명맥을 이어간 발자취를 보여준다.
마지막 부조에는 충칭이 새겨져 있는데 김구 선생이 직접 쓴 '광복조국(光復祖國)'이 배경으로 깔려 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줄곧 중?한 우정의 증거로 손꼽히고 있다.
1992년 중?한 수교 이후, 양국은 각 분야에서 긴밀한 교류를 이어가고 있다.
"2019년 (진열관) 당시 관람객 수는 약 5만 명으로 최고치를 찍었는데 그중 절반이 한국 관광객이었습니다." 샤 부관장은 (코로나19 이후) 올 3월부터 관람객 수가 다시 늘어나 지난달 31일을 기준으로 2만8천여 명이 이곳을 찾았다며 그중 6천 명 가량이 한국 관광객이었다고 말했다.
개관 후 28년간 약 200권에 달하는 관람객 방명록에는 중국 정부가 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 유적지를 복원하고 잘 보존해 준 것에 대한 한국 관람객들의 놀라움과 감사의 마음을 담은 글이 적혀 있다. 이는 중?한 양국의 두터운 우정을 여실히 보여주는 증거라 할 수 있다.
한국 관광객 황신준(28)씨는 지난 3일 방명록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유적지를 지켜 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라는 글을 남겼고 송세호(23)씨는 우정이 지속되고 더 좋아지길 바란다고 염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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